변화
세상은 변화한다. 생물, 무생물 관계 없이 변화한다. 평균으로의 회귀... 자연의 법칙이다. 무수히 많이 수행하면 평균으로 회귀한다. Bell Curve. 뜨거운 물과 찬 물을 섞으면 미지근한 물이 되듯, 모든 세상은 평균으로 회귀한다. 그렇지만... 평균으로 회귀하다가 정말 낮은 확률로 중력체가 생겨서 우주가 생긴 것 아닐까? 또는 그곳에서 중력체가 생겨서 더 넓게 우주가 퍼졌으니 전체 계로 본다면 엔트로피는 증가한 것일까? 무용해진 것일까? 그 집중도가 낮아졌다고 보는 것이 맞나?
자연적인 순리는 모든 세상 만물은 집중도가 낮아지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번개는? GPT에게 물어보니 전체 계로 본다면 에너지가 주위로 퍼지면서 엔트로피가 증가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한다. 전체 계... 부분과 전체의 관점. 그런 것과 관계없이 변화하는 세상.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린 시간이 정지했다고 느낄까? 눈을 감고 숨도 못 쉬고, 아무 감각도 느낄 수 없다면 우린 시간이 흐른다고 느낄까? 아니다. 변화는 필연적이다. 변화 = 시간이다.
변화의 속도가 우린 다르다고 표현한다. 생명체의 변화 속도는 돌의 변화 속도보다 매우 빠르다. 생명체마다 그 변화의 속도가 다르다. 시간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공평한가? 또는 사람마다 사용하기 나름인가? 우린 시간의 절대적인 기준을 만들었지만, 그 사람의 변화 속도에 따라 시간은 다르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을 알차게 쓰자. 시간을 진정성 있게 사용하자.
의미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고등 생명일수록 그러하다. 자신의 새끼가 죽으면 고통스러워 하는 존재. 감정. 의미. 이런 건 왜 있는 것일까? 모든게 죽으면 덧 없는가? 덧 없는 걸 알면서도 우린 발버둥 치는가? 왜 발버둥이라고 표현하지? 그저 변화일 뿐이다. 모든 것은 그저 변화인데, 우린 왜 하고 싶은 일을 찾는가? 아무거나 하면 안되나? 외로우면 안 되나?
진화론적 관점에서 우리는 번식을 목표로 한다. 그냥 번식보다는 지속되는 번식을 목표로 한다. 또 자유 의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즉, 내 의지로 먼 세대까지 이루어지는 번식을 하려고 한다. 갇혀 있는 가축은 누구보다 번식을 잘 한다. 하지만 행복한가? 생명체는 왜 개인의 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공동체 안에 있으려고 하는 것일까? 개인의 독립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한 몫을 해야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다른 생각을 해야 공동첵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고, 변화가 이루어지고 공동체 안에서의 진보라는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지 않을까. 우린 결국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의미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생물 vs 무생물
무생물에는 돌, 바다, 흙, 구름, 하늘이 있다. 생물은 그 안에 산다. 작은 미생물도 흙이 있어야 산다. 우린 자연과 공존한다. 그 위에 아스팔트를 깔고 건물을 지었지만 여전히 자연과 함께 산다. 공기가 그렇다. 자연만 있는 상태를 생각해보자. 그 상호작용. 바람, 번개, 불, 물, 흙만 있다면... 변화가 이루어지는가? 달이구나. 그런 곳이 달이다. 대기가 없기 때문에 그곳은 변화가 드물다. 때로는 운석이 떨어진다.
생물은 변화를 촉진시킨다. 나무는 광합성을 통해 산소를 생성하고 그 산소는 대기권을 형성했다. 대기권은 다른 생물을 탄생시키지만 돌을 깎고 비를 내리고 번개를 내리 친다. 미생물은 다른 무생물을 갉아 먹으며 성장한다. 태초에 무생물만 있던 시절에 어떤 기적이, 정말 낮은 확률의 무엇인가가 발생해서 생물을 만들었을까. 정말 낮은 확률의 변화. 그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우린 기적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애초에 이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그저 변화일까? 변화에 정의란 없다.
존재 (인간)
실존주의. 우린 왜 존재하는가? 존재 자체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그저 존재하는 것에 충실하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의미 없는 삶을 살면 죽고 싶어한다. 옆에 아무도 없이 혼자 남겨진 사람은 죽고 싶어한다. 끊임 없이 사는 의미를 찾고 싶어한다. 변화를 감사하게 여기자. 감사해야 하나? 그저 하나의 변화 아닌가? 내가 죽는 것은 그저 하나의 변화다. 의미를 부여해야 하나? 돌은 이런 고민을 안 한다. 돌은 고통스럽게 고민하지 않고 그저 존재한다. 그 녀석의 목적이 있는가? 없다. 그럼 우리는 왜 의미를 부여하나? 왜 목적을 찾고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하는가?
존재의 의미는 없다. 그저 변화이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가족이 없었다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가족을 찾았을까. 어른이 된 지금은 그 사랑을 베풀어야 하나? 그것이 나에게 의미를 주나? 자기 기만 아닌가? 그저 살면 되는데 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가. 서로에게 왜 기대려고 하는가. 의미를 찾지 않는 삶이 행복한 삶인가? 아니다... 아무 의미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 사는 이유를 찾는 것도 복인가? 애초에 의식주가 만족이 되지 않았다면 살고 싶었을까? 하지만 그 보다 더 무서운 것은 혼자 있는 것일 것 같다. 정말 여러 명이 있는 지구에서 식량이 부족하다면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겠지만, 혼자 남은 지구에서는 무조건 자살할 것 같다. 인간은 같이 산다. 공존해야 한다.
사랑이 뭘까?
사랑한다는 것. 진화론적으로 보면 공동체에서 부부가 있었을까? 단 둘이 사는 의미가 있었을까? 많은 동물이 그러하다. 사랑을 한다는 것. 사회에 사랑이 부족한가?
현재와 미래 : 지속
내가 살기 위해서는 사회에 있어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나를 발휘해야 한다. 내가 남들보다 잘 하는 것. 잘하고 싶은 것.
1. 자기 조절 능력이 뛰어남. 스트레스 관리를 잘 한다.
2. 의지가 강하다. 쉽게 포기하는 일이 없다.
3. 종합적으로 학문을 좋아한다. 뭐든 지 좋아한다.
4. 평화적인 방식을 선호한다. 환경에 대해서도, 에너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정도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알게 된 장점들이다. 하나의 일만 하고 싶어하지 않고, 다이나믹한 삶을 원하는 나에게 Project Engineer EPC 는 최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소통하고 협력해야 한다. 기능이 기능을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일에서는 신뢰를, 가족에서는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사회적인 사람이 되자. 사람을 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래야 살아 남을 수 있다. 그러다가 모든 덧없음을 깨닫고 죽는 것 까지가 나의 미래이다. 그것은 세상의 이치다.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에 감사하자. 변화에 감사하자.
난 항상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주위 사람을 잘 챙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파이를 더 크게 만들어서 주위 사람에게 나누어 주자. 정직하자. 모두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 다양성을 이용하여 사회에 기여하고, 더 나은 환경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조화로운 삶. 고민하고, 노력하고, 변화하는 사람이 되자.
자연 세계의 전문가.
인간 세계의 전문가.
자연 <-> 인간 세계의 전문가.
공학 (자연에 대한 인간의 생각 + 사회에 대한 인간의 생각). 평화. 공존. 질서. 지속가능성.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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