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소통은 오해를 부른다. 우리의 뇌를 꺼내서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대로 내 생각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정말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한다면 오해가 없을까? 오해는 없어도, 더 많이 싸울 것 같다.
우리는 소통을 할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만을 말한다. 싫은 생각, 감정, 불편함은 감춘다. 그렇게 내 생각을 표현하면, 정확하게 100 %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다.
생각이라는 거는 아주 깊게 내려가면 하나의 추상적인 덩어리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Neural Network 처럼 ! 그 추상적인 생각들이 연결되어 구체적인 생각이 발생한다. 나는 그 추상을 좋아한다. 추상은 순수하고, 방향이 없다.
'생각'은 방향이 중요하다. 핵 폭탄의 창시자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렇게 될 지 몰랐을 것이다. 어떤 프로젝트 간에 그 방향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해를 풀고, 모두가 자신의 일에 정진하여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방향을 잘 설정하고 싶다.
눈치
내 인생이다.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각자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된 데에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에 속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대로 산다는 거는 때로는 좋게 말하면 개인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이기적이다. 그 차이가 뭘까?
'개인적이다' 라는 말은 '나'와 '타인'을 보는 시선이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즉, 남이 나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도 남에게 부탁할 때 당연하게 부탁하지 않는다.
'이기적이다' 라는 말은 '나'와 '타인'을 보는 시선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오직 '나'의 이익을 위한, '나'의 욕구에 의해서 행동한다.
사람은 부모에게서 받고 자란다. 그렇다면, 부모에게서 받는 게 당연한가? 근데 당연한 것처럼 사춘기를 지내온 우리는 그걸 갚아야 하지 않은가? 과거의 '집단주의'로 살아온 아이는 커서 '개인주의' 성향을 갖을 수 있는가?
이 주제는 상황마다 너무 다르고, 정확한 정답이 없는 주제이다.
'개인적인' 성향의 사람에게 부모를 부양하지 않아도 되는 정당성을 부여하려면, 본인이 늙었을 때도 자기 자식에게 동일한 책임을 부여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다.
내 생각은 타인의 대한 기대가 없어야 한다. 내 능력 안에서 남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풀고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럴려면, 내 능력을 키워야 한다. 만약에 대가를 바란다면, 그건 타인이 아닌, 객관적인 사업 주체로 바라봐야 한다. 만약에 타인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바란다면, '왜?' 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리고 그 정답이 '내가 대가를 원함' 이라면 그 사실을 타인에게 인지시키자. 난 대가를 원하고, 너를 도우니, 너도 동일하게 행동해야 한다 라고 말이다.